번역 아카이브/아도르노: 영화에 담긴 투명성들

[아도르노 번역] 영화에 담긴 투명성들 (4/5)

zerovisualculture 2025. 5. 2. 19:01

Transparencies on Film by Theodor W. Adorno

 이 글은 New German Critique, No. 24/25, Special Double Issue on New German Cinema (Autumn, 1981- Winter, 1982), 199-205. 이 에세이는 1966 11 18일자 『디 차이트(Die Zeit)』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하며, 이후 테오도어 W. 아도르노의 『Ohne Leitbild(프랑크푸르트/마인: 수어캄프, 1967)에 수록되었다. 번역은 Thomas Y. Levin의 영어본을 따른다.

목차 

1. 아버지의 영화

2. 거짓말과 해독제 

3. 사실주의 영화 비판

4. 몽타주의 딜레마

5. 결론

영화 기술은 사진 과정에 내재된 사실주의에 맞서는 일련의 기법들을 발전시켜왔다. 그 가운데는 소프트 포커스 샷사진술에서는 한참 전에 구식이 된 예술적 관습, 이중 노출, 그리고 자주 사용되는 플래시백이 포함된다. 이제는 이러한 효과들의 우스꽝스러움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제거할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법들은 개별 작품의 필연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관습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관객에게 무엇이 의미되고 있는지, 또는 기본적인 영화적 사실주의로는 포착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추가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러한 기법들은 거의 항상, 비록 상투적일지라도, 고유한 표현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표현과 관습적 기호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한다. 이 불일치가 이러한 삽입 장면들을 키치(kitsch)로 보이게 만든다. 몽타주나 디제시스 외부와의 연결 맥락에서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는지 여부는 아직 검토되어야 한다. 어쨌든 이러한 영화적 일탈은 영화 감독의 특별한 세심함을 요구한다. 이 현상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변증법적이다. , 영화가 언어라는 제 본성을 무시한 채 기술만을 고립적으로 다룬다면, 오히려 영화 자체의 내적 논리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방된 영화 제작은 이제 더 이상 기술즉 단순히 직업적 장비에 불과한 것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이는 결코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새로운 객관성(neuen Sachlichkeit)’ 방식이다. 그러나 상업 영화 제작에서는, 그 질료에 내재된 미학적 논리가 제대로 전개될 기회조차 갖기 전에 이미 위기의 국면에 빠진다. 기술, 질료, 내용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에 대한 요구는, 수단에 대한 물신주의와는 결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영화가 실제로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에 부합한다는 점, 혹은 어쩌면, 소비자들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 즉 현재 제공받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 에 대한 무의식적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문화 산업이 대중 문화로 자리 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의 동일성은, 비판적 사유가 생산 측면에만 주목하고 수용의 경험적 분석을 회피하는 한,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산업이 소비자의 예술이라는 데에 완전히 동의하거나 어정쩡하게 동의하는 옹호자들을 반긴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문화 산업을 모든 시대의 저급 예술과 단순히 동일시하는 축소적 등식조차도 성립하지 않는다. 문화 산업에는 하나의 합리성 요소 저급한 것을 계산적으로 재생산하는 합리성 가 존재한다. 이는 과거의 저급 예술에서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 저급 예술의 본질적 이성은 아니었다. 게다가, 로마 제국 말기에 인기를 끌었던 서커스와 벌레스크의 하이브리드 형태가 지닌 고귀한 조악함과 어리석음이, 오늘날 미학적이고 사회적으로 투명해진 이런 현상들의 부활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설령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 현재만을 보더라도, 소비자 지향적 예술에 대한 논거의 타당성은 공격받을 수 있다. 그 옹호자들은 예술과 수용의 관계를 공급과 수요의 원리에 따라 정태적이고 조화로운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 자체가 의심스러운 모델이다. 당대의 객관적 정신과 무관한 예술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정신을 초월하는 순간이 없는 예술도 상상할 수 없다. 예술 창조에 본래적으로 수반되는 경험적 현실로부터의 분리는 바로 그 초월적 순간을 필요로 한다. 반대로, 인도주의를 가장하는 소비자에 대한 순응성은 단지 소비자 착취를 위한 경제적 기법에 불과하다. 예술적으로 보면, 그것은 현재의 통속적 표현물의 달콤한 실체에 대한 모든 개입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관객의 물화된 의식에 대한 개입 역시 포기하는 것이다. 문화 산업은 이러한 물화된 의식에 위선적으로 복종하며 그것을 재생산함으로써, 그 의식을 더욱 변화시키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문화 산업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다. 문화 산업은, 사람들이 은밀히, 그리고 깊은 곳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변화하고자 하는 욕구를 스스로 실현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소비자들은 그저 소비자로 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 산업은 소비자의 예술이 아니라, 희생자들에 대한 지배자들의 통제가 투영된 것이다. 기존 형태로 현상 유지(status quo)가 자동적으로 재생산되는 것 자체가 지배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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