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정치적 영화론에 대한 노트
질 들뢰즈의 영화론에는 유럽 영화가 대부분 등장한다. 『운동-이미지』의 마지막 부분과 『시간-이미지』 초반에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지 겐지 등 일본 영화 감독들이 언급되지만, 대체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영화들이 영화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가 비유럽 영화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지점이 있다. 바로 ‘정치적 영화’를 논할 때다.
들뢰즈는 『시간-이미지』에서 프랑스 영화감독 알랭 레네와 독일 영화감독 장 마리 스트로브를 현대영화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적 시네아스트로 평가한다. 왜 이들의 영화가 가장 정치적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이들의 영화는 (그 유명한) ‘민중 (peuple)의 부재’, 즉 더 이상 민중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이러한 민중 부재의 영화로 인해 고전영화와 현대영화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본다. 레네와 스트로브의 영화는 터키, 브라질, 세네갈 등의 영화인 ‘제3세계’ 영화들과 함께 ‘정치적 영화’의 계열을 형성한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정치적 영화’는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역사적 분기점이자, 국가 경계를 넘어선 트랜스내셔널 영화로 간주된다.
들뢰즈가 말하는 정치적 영화는 크게 네 가지 성격을 지닌다. 첫째,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처럼 ‘거기에 있는 민중’,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민중을 이상적으로 재현하려는 믿음을 포기한 영화다. 왜 포기하냐고? 민중에 대한 믿음이 바로 히틀러와 스탈린주의를 낳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영화는 지금 현실에 존재하는 민중을 이상화시켜 재현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정치적 영화는 사적인 문제를 곧바로 사회적인 혹은 정치적인 것과 뒤섞는다. 들뢰즈는 이 지점에서 푸도프킨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고리키식 의식화를 단호히 거부한다. 의식화는 지식인(시네아스트)의 ‘사상누각’일 뿐, 정치적이든 사적이든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정치적 영화는 정치적 영역 안에 사적 요소가, 사적 영역 안에 정치적 요소가 스며들고 통과하여 서로를 도취상태나 위기로까지 몰고 가는 상태를 포착한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구분 불가능하다. 이 때 등장인물은 정치적인 것과 사적인 것 간의 과도기, 이행, 통과, 생성의 과정에 놓여 있다.
셋째, 정치적 영화는 단일하고 통합된 민중이 아니라 소수 상태로 파편화된 민중을 다룬다. 예를 들어, 흑인의 유형과 ‘성격’을 복수화하거나, 여성을 ‘순수한 음향과 시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적 상황’ 에 놓기 등이다. 이는 소수자로 흩어진 오늘날의 ‘민중’을 포착하기 위한 전략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영화는 부재한 민중을 대신해 집단적인 언표를 창조하는 영화작가를 필요로 한다. 신화, 허구, 이데올로기, 기억을 혼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영화작가, 즉 집단적 대리자, 효소, 촉매로서의 영화작가의 영화가 바로 정치적 영화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정치적 영화에 대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들뢰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민중(peuple)’을 전제로 정치적 영화를 구성했지만, 정체성 정치 이후 민주주의가 직면한 문제 역시 바로 이 부재하는 데모스(demos) 아닌가? 사적인 것이 넘쳐흘러 정치 영역과 공적 영역을 잠식한 세계가 바로 오늘날의 현실 아닐까. 들뢰즈의 정치적 영화 개념은 1970년대 서구 모더니즘 영화와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그리고 그의 영화론에서 왜 비유럽영화는 유독 ‘정치적 영화’로만 등장하는가? 오늘날 이 개념을 다시 읽는 것은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