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바쟁의 『영화언어의 진화』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유성영화에서 1940~50년대 네오 리얼리즘으로 이어지는 영화사를 몽타주와 롱테이크라는 형식적 기준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몽타주를 주로 사용한 감독으로는 그리피스, 아벨 강스, 에이젠슈테인 등이 있다. 이들은 현실보다는 이미지 자체를 신뢰하며, 이미지들간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몽타주를 주된 형식으로 사용한다. 바쟁은 이들의 영화가 ‘이미지들이 객관적으로는 내포하지 않은 하나의 의미, 오직 이미지 상호간의 관계로부터만 나오는 의미를 창조’하는 특징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쟁은 롱테이크와 그에 수반되는 딥 포커스를 주로 사용한 감독으로 에릭 폰 스트로하임, F.M.무르나우, R. 플래허티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의 영화는 이미지간의 관계보다는 영화 이전부터 존재하는 세계 내의 관계들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이들은 ‘이미지가 현실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드러낸다’는 관점을 따른다.
몽타주와 롱테이크라는 두 형식적 경향은 단지 기술이나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의미의 단일성과 애매성의 대비로 나타난다. 몽타주를 사용하는 감독들은 관객에게 단일하고도 통일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와 이미지 간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반면, 롱 테이크와 딥 포커스를 선호하는 감독들은 세계에 내재된 애매함과 불확실성을 드러내고자 사건의 시간적 지속을 유지한다. 바쟁은 초기 유성영화 시기 이후 영화언어가 기술적으로 원숙해지면서 이 두 가지 형식의 종합이 이뤄졌다고 본다. 장 르누아르, 로셀리니, 데 시카, 오손 웰즈 등은 원 쇼트 원 시퀀스 혹은 시퀀스 쇼트를 사용해 현실의 ‘참된’ 연속성을 보여준다.
바쟁은 장 르누아르를 치하하면서 ‘세계를 분할함이 없이 그 모두를 표현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과 사물의 감춰진 의미를 그 자연스런 단일성을 깨트리지 않고 드러내고자 전력을 다했던’ 감독이라고 평가한다. 결국 바쟁은 (한국어로는 번역하기 까다로운) ‘profilmic’ 현실, 즉 카메라 앞의 현실을 편집된 현실, 즉 포스트필름보다 우위에 두었고, 그래서 리얼리즘 영화론자로 분류된다. 리얼리즘 세계에서 스크린은 현실보다 결코 클 수 없으며, 이미지는 현실에 대한 충실성에 근거해야 한다.
『영화언어의 진화』에 대한 일반적인 독해는 여기까지이다. 바쟁의 이 글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유성영화에서 네오 리얼리즘 영화로 이어지는 기술적 전환을 ‘진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실 이 글에서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바쟁의 기술 결정론에 대한 입장이다. 바쟁은 사운드의 발명을 통해 영화가 표현 수단을 더욱 풍부하게 갖추게 되었고, 이를 리얼리즘 영화미학의 진전으로 본다. 그는 몽타주 형식을, 아직 기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무성영화 시대의 산물로 간주하며, 유성 영화 시대 이후에 보다 충실한 리얼리즘 표현이 가능해졌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바쟁은『영화언어의 진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이미지는 그 조형적 구조와 시간 구성에 있어서 보다 더 큰 리얼리즘에 근거하고 있기에, 현실을 내부로부터 굴절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한 훨씬 더 많은 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영화기술이 발전할수록 리얼리즘은 더 풍부하고 정교해진다는 것이다. 바쟁에게 롱테이크와 딥 포커스는 현실의 신비로움, 애매함, 다의성을 드러내는 형식일 뿐 아니라, 독일 표현주의나 러시아 몽타주처럼 작위적인 의미 생산 양식을 넘어선, 기술 진화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바쟁은 이러한 기술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지질학의 비유를 가져온다. 이는 『영화언어의 진화』에서 가장 낯설지만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는 1939년 발성영화를 지리학자들이 말하는 하천의 평형 상태에 비유한다. ‘1939년 발성영화는 지리학자들이 하천의 평형단면이라고 부르는 바에까지, 즉 충분한 침식 결과로서의 이상적인 수학적 곡선에까지 이르렀다...그러나...지질변동이 돌발한다면 수원의 표고를 변화시킨다. 수원은 다시 작용을 시작하여 그 밑에 있는 토양을 깊이 침식해서 움푹하게 패어 놓는다. 때때로 바닥이 석회질의 지층일 때엔 전혀 새로운, 내부가 공동화된 기복이 부각된다. 그것은 지상에서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물길을 따라 가보면 복잡하고도 심한 기복을 만들어낸다.’ 바쟁은 영화기술의 발전이 지질변동처럼 작용한다고 본다. 영화사는 단순한 양적 축적이 아니라 자연사적 전환이 일어나는 유기적 흐름이라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AI 기술은 바쟁이 말한 또 하나의 ‘지질변동’일까? 지금 우리는 기술을 더 이상 배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바쟁의 말처럼, AI 시대 영화가 ‘보다 더 큰 리얼리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까닭에, 현실을 내부로부터 굴절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한, 훨씬 더 많은 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바쟁이 상정한 유기적 진화 모델은 디지털의 도래와 함께 다른 궤도에 진입했을 수 있다.
예컨대, 롱테이크가 현실의 애매함과 다의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형식이었다면, AI 이미지 생성은 알고리즘에 따라 예측된 세계를 재구성한다. 그것은 더 이상 카메라 앞의 현실이 아니라, 카메라 없는 예측된 이미지다. 영화는 침식과 퇴적을 반복하며 생태적으로 변형되는 유기체가 아니라, 모듈 교체가 가능한 인공 시스템이 되었다. 디지털 영상에서는 하나의 이미지, 클립, 필터, 이펙트, 색보정까지 모두 모듈화되고 있다. AI 시대의 이미지는 프롬프트에 원하는 스타일, 감정, 분위기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생성된다. 거기에는 바쟁이 영화에서 찾고자 했던 ‘참된’ 리얼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쟁은 롱테이크 이후의 몽타주는 공간의 박진감과 극적•심리적인 데쿠파주(촬영 계획 대본)로 진화했다고 보았다. AI 시대 몽타주는 이러한 극적 효과를 넘어서 어디로 향할까? 영화 언어는 정말로 ‘진화’하고 있는가? AI 생성 이미지는 과연 바쟁이 옹호했던 <독일 영년>속 소년의 얼굴이 지닌 그 신비로움을 간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