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컴패니언>(companion, 드류 핸콕 시나리오/감독, 2025)은 공포, SF, 로맨스, 코미디를 절묘하게 뒤섞은 저예산 장르 영화다. 영화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일상화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단 하나의 로케이션와 여섯 명의 주요 등장인물만 등장하는 단촐한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단순함은 곧 강점이 된다. <컴패니언>은 ‘잘 만든’ 영화인데, 여기서 말하는 ‘잘 만든’ 영화란, 익숙한 장르 규칙을 진부하지 않게, 오히려 참신하게 되살려낸 작품을 뜻한다.
흔히 공포, SF, 판타지 장르는 사변(思辨)적 장르 또는 상상력 장르, 사고 실험 장르라고 불린다. 이는 경험이나 현실이 아닌, 가능성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비현실적이고 가상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장르를 의미한다. 사변적 장르에는 세 가지 핵심요소가 있다. 첫째, 서사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 세계(관), 둘째, 그 세계에 던져진 인물, 셋째, 장르 고유의 규칙 또는 관습이다. <컴패니언>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비틀고, 반전의 시나리오를 통해 익숙한 공식을 벗어난다.
1. 3막 구조와 아이리스의 진화
영화는 전통적인 3막 구조를 따른다. 1막에서는 AI 여성봇(반려봇이자 섹스봇)인 아이리스와 그의 주인 조쉬가 세르게이의 저택을 방문하고, 세 커플(불륜 커플인 세르게이와 캣, 게이 남성과 로봇 커플인 일라이와 패트릭, 이성애 남성과 로봇 커플인 조쉬와 아이리스)이 서로 만난다는 설정을 구축한다. 아이리스(소피 대처)의 살인이 발생하면서 2막으로 넘어가고, 이때부터 연쇄 살인이 시작되어 상황은 점점 통제불능으로 치닫는다. 3막에서 아이리스는 조쉬(잭 퀘이드)를 제거하고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이 영화의 영리한 지점은 3막 구조를 아이리스의 지능 변화에 맞춰 배치했다는 점이다. 남자친구이자 아이리스의 주인인 조쉬는 아이리스의 지능을 40으로 맞춘다. 그는 그녀를 스마트폰으로 조작하며 통제하지만, 아이리스는 조쉬의 핸드폰을 훔쳐 자신의 지능을 100까지 끌어올린다. 2막에서 똑똑해진 그녀는 독일어까지 구사하며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3막에서는 로봇 회사 직원의 도움을 받아 전면자기제어 장치를 확보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획득한다. 이러한 아이리스의 성장은 전통적인 극작 구조 속에 안전하게 배치되어, 사변적 장르의 세계관을 낯설지 않게 전달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도 있지만, 오히려 상상력에 기반한 사변적 장르는 고전적 극작법을 통해 더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또한, 영화 초반 아이리스는 나레이션을 통해 조쉬를 사랑하며 그를 죽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보를 조기 누설함으로써 서사적 긴장을 줄일 위험이 있지만, 반대로 관객의 시선을 조쉬라는 인물에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의 살인 계획과 행동을 주목하는 극적 장치인 것이다. 감독에 따르면, 이는 스펙 스크립트(spec script) 형식에서 비롯된 장치다. 스펙 스크립트는 작가가 제작사의 의뢰 없이 자발적으로 작성한 판매용 시나리오로, 초반에 관객의 흥미를 확실히 끌 수 있는 요소가 필수다. 이런 서사 장치 또한 <컴패니언>이 '뻔한 영화'를 비껴가는 결과를 낳는다.
2. 중심 장르 틀에서 서브 장르 시퀀스 배치하기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공포 영화의 장르 공식을 따른다. 매 10분마다 한 명씩 죽는 구조는 고전 슬래셔 영화의 리듬을 따른다. 커플들이 외딴 저택에 모이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차례차례 제거되는 식이다. 이 구조는 ‘최후의 여자(final girl)’라는 공포 영화의 공식도 따른다. 영화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아이리스다. 게다가 고립된 저택이라는 공간과 연쇄적 살인 사건은 고딕 공포 장르의 전형적 배경과 서사를 이 영화가 가져왔음을 알려준다.
감독은 장르의 문법에 능통하다. 예컨대 이제는 고전이 되어 속편까지 나오고 있는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1974)의 고속도로 살인 장면을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1991)의 T-1000의 등장 장면과 겹치듯 연출함으로써, 공포 장르와 SF 장르의 미장센을 교차 참조한다. 이러한 장르적 친숙함은 사변적 설정의 낯설음을 보완한다.
한편 영화는 공포를 중심 장르로 설정하되, SF, 로맨스, 코미디를 서브 장르로 유연하게 활용한다. 섹스봇이 택배처럼 집으로 배달되고, 그들에게 가짜 기억이 주입되어, 인간 주인에게 맹종한다는 설정은 SF적 상상력이다. 인간이 로봇에게 살인 교사를 하거나 고문을 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SF 세계에서 섹스봇과 인간 주인 간의 관계는 로맨스라는 장르 코드로 탈바꿈된다. 영화는 경쾌한 음악, 밝은 조명, 무표정하고 지루한 표정 연기, 밋밋한 배경 등으로 과장과 극화를 피하고, 썰렁한 유머와 어설픈 몸짓으로 아이러니한 톤을 유지한다. 그러면서 아이리스의 선조격인 <엑스 마키나>에서의 에바와 <블레이드 러너>의 프리스에 친밀감의 색채를 씌운다. 공포와 로맨스의 장르적 아이러니는 그렇게 완성된다.
3. 스테레오타입과 놀기
<컴패니언>의 가장 세련된 미덕은 아마도 스테레오타입을 전복하는 방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섹스봇의 성장 서사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아이러니하지만,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관객의 예상을 의도적으로 배반한다. 초반에 조쉬는 아이리스에게 다정한 애인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세르게이의 돈을 훔치기 위해 아이리스를 이용하는 보잘 것 없는 인셀남으로 밝혀진다. 게이 커플인 일라이와 패트릭 중에서 패트릭이 또 다른 섹스봇인 사실은 뒤늦게 드러난다. 불법 자금을 축적한 줄 알았던 세르게이는 알고 보니 잔디 사업으로 정당한 부를 일군 갑부이고, 그에게 학대당하던 캣은 사실 그를 살해할 계획을 꾸미고 있던 인물이다. 낭만적 기억은 로봇의 기억이었고, 해방의 쾌감은 인간이 아닌 로봇에게 주어진다.
감독은 관객이 갖고 있는 러시아 남성, 로봇, 낭만적 사랑, 선과 악, 기억의 주체 등에 대한 고정관념을 서사의 반전 장치로 적극 활용한다. 이는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온 이미지의 틀 자체를 건드리는 장치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컴패니언>은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메타적 논평을 수행하며, 아이러니라는 비평적 장치를 장르 안에서 구현한다. 결국 잘 만든 저예산 (사변적) 장르 영화란 잔혹함의 과잉 경쟁이 아니라 아이러니의 거리두기를 통해 관객에게 어필하는 작품일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