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영화 속 인간과 로봇 사이의 긴장
2. 비인간 인공 생명체의 정동의 문제
3. AI 정동에서 체현의 문제
4. 감정의 모빌리티
5. 나가며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 시어도어(호아킨 피닉스 분)는 아내(루니 마라 분)와 현재 별거중이다. 타인의 마음을 전해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외롭고 공허하다. 그러던 어느날, 시어도어는 퇴근 길에 엘리먼트 소프트웨어가 출시한 인공지능 운영체제 OS1 광고를 보게 된다. “당신의 말을 들어주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아는 직관적인 존재”라는 광고 문구에 매료당해 소프트웨어를 구매한 시어도어는 몇가지 설정 선택 끝에 여성의 목소리를 한 맞춤형 운영체제 사만사(스칼렛 요한슨 분)를 만나게 된다. 시어도어의 이메일을 정리하고 그의 일을 도우면서, 운영체제인 사만사는 조금씩 시어도어의 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학습하며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만사와 함께 하면서 시어도어도 우울감에서 빠져나와 점차 밝아진다. 이제 그에게 사만사는 단순한 컴퓨터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연인이자 동반자가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사랑에 빠진 여느 남녀와 같이 이들도 몸을 통한 교감을 원하게 되면서, 사만사는 다른 인간 여자들처럼 자신에게는 육체가 없다는 것을 큰 결여로 여기게 된다. 이에 그녀는 시어도어와의 육체적 관계가 가능하도록 몸을 빌려줄 대리인을 구한다. 낯선 여인에게서 사만사의 목소리를 듣고 시어도어의 몸이 반응하지만, 시어도어가 눈을 떠 얼굴을 보는 순간 이는 실패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이렇게 영화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정동적 상호작용을 부각하고 있지만, 체현된 신체라는 지점에서 상호작용은 벽에 부딪힌다.
정동은 뒤얽힘과 마주침이 일어나는 장소, 즉 몸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정동을 논할 때 몸의 존재는 “필요불가결”(15)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녀>의 인공지능 사만사의 신체 없음 즉 탈체현(disembodiment)은 신체 없는 인공지능의 정동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 인간과 인공지능의 상호 정동적 관계는 불가능한 것일까? 포스트휴먼 주체성을 논의한 로지 브라이도티조차 비인간 주체들과 나아가 테크노 타자들과의 새로운 사회적 접속 양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할 때, ‘체현’된 비인간 주체를 전제로 설명하고 있다.(16)
포스트휴먼 주체성의 관점에서 실재와 가상의 육체성, 정보로서의 신체를 둘러싼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한 캐서린 헤일스는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My Mother Was a Computer)에서 정보로 이루어진 디지털 주체가 물질성(materiality)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단언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 책에서 포스트휴먼의 일부 판본들이, 자아를 마음과 연관짓고 신체는 마음이 작용하기 위한 용기에 불과하다고 보는 자유주의 전통의 중요한 특징인 탈체현을 계속해서 재기입하고 있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에 따라, 헤일스는 물질성의 위치를 물리성과 별개로 재설정하려고 시도하는데,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의 전환을 촉구한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논의를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물질성은 단순한 물리성(physicality)과는 다른 것으로, 물리적 실재와 인간의 의도가 만나는 지점 즉 인간 의미에 중요한 물질의 구성이 물질성인 것이다.(17) 즉, 신체 없는 인공지능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구성해 낼 때 인공지능은 (물리성이 아닌) 물질성을 가진 정보화된 포스트휴먼 신체가 된다. 포스트휴먼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감정이입과 욕망을 핵심적 특질로 하는 복잡하게 관계적인 주체로 대체되는 것이다.(18) 헤일스는 니콜라스 게슬러(Nicholas Gessler)가 제안한 ‘상호매개(intermediation)’ 개념을 통해 컴퓨터 및 디지털로 이루어진 계산체제 세계관의 상호작용을 설명한다. 계산체제에서는 복잡한 피드백 루프들이 서로를 연결하며 복수의 인과관계들이 공동생산과 공진화를 이루면서, 한 레벨의 창발이 다른 레벨의 창발로 연결되는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이러한 상호매개 개념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상호작용, 언어와 코드 재현시스템들 간의 상호작용을 넘어 지능형 기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에까지 적용될 수 있다. 정리하면, 비록 인간과 인공지능은 서로 다른 종류의 물질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세계관에 속해있지만(19) 이들을 함께 절합하는 인지 활동의 그물망 속에서 이들은 역동적 상호매개(dynamic intermediation)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20)
스와프나 로이(Swapna Roy)는 역동적 상호매개로 연결된 시어도어와 사만사의 상호작용을 ‘내장적 감각(visceral sensibility)’을 통한 시뮬레이션 개념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21) 그는 사만사를 일종의 ‘이미지가 없는 가상적 몸’으로 규정하고, 비록 사만사에게 공간을 점유하는 피부와 윤곽이 없지만 대신 단순한 피부 진피층보다 더 깊은 두 번째 차원의 육체(flesh), 즉 내장적 감각이 존재한다고 바라본다. 내장적 감각의 즉각성은 여타 외재적인 감각에 앞설 정도로 급진적인 것으로 시각, 청각, 또는 촉각적 지각을 고유 수용성 감각(proprioception)(22)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강도(intensity)의 등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만사와 시어도어가 목소리를 통해 성적 흥분에 도달하는 장면은 내장적 감각을 통한 시뮬레이션 효과를 잘 설명해준다. 사만사가 “날 어떻게 만져줄래요?”라고 묻는 목소리는 시어도어의 뇌에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내 손가락 끝으로 당신의 얼굴을 만질 거에요. 그리고 내 뺨을 당신 뺨에 댈 거에요”라는 시어도어의 말에 사만사는 이렇게 답한다. “믿기지 않아요. 내 피부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사만사와 시어도어가 목소리라는 청각을 번역해 고유 수용성 감각으로서의 촉각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성적 흥분의 강도를 가지고 등록되는 것이다.
사만사에게 비록 육체는 없지만 그녀는 코드와 언어라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재현 시스템을 통해 시뮬레이션적으로 존재하며 소통한다. 언어가 텍스트, 생활 세계, 자연 언어, 인간이라는 의미망 속에 존재한다면 코드는 디지털, 계산체제, 컴퓨터 언어, 기계라는 의미망과 관련되어 있다. 코드를 통해 디지털적으로 존재하고, 학습하고, 반응하는 인공지능 주체 사만사가 언어를 통해 시어도어와 소통하고 그의 감정을 이해하며, 나아가 언어를 기반으로 한 감각 시뮬레이션을 경험하는 것이다. 인공지능 주체인 사만사가 코드와 언어를 함께 사용해 주체를 형성하고 상호작용을 하는 모습은, 헤일스가 ‘상호매개’ 개념을 통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상호작용, 언어와 코드 같은 재현시스템들 간의 상호작용, 지능형 기계들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고자 했던 시도의 예화(exemplification)와도 같다.
(15) 멜리사 그레그·그레고리 J. 시그워스 편저,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정동 이론》, 갈무리, 2015, 17쪽.
(16) 로지 브라이도티, 이경란 옮김, 《포스트휴먼》, 아카넷, 2015, 134쪽.
(17) N. 캐서린 헤일스, 이경란·송은주 옮김,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아카넷, 2016, 13-16쪽.
(18) 로지 브라이도티, 앞의 책, 40쪽.
(19) 영화 <그녀>에서 사만사는 시어도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난 몸이 없지만 우리는 다 물질로 만들어져 있잖아. 우주라는 한 이불을 덮고 있다고”
(20) 이러한 상호매개의 상태는 인간행위자와 비인간행위자의 네트워크로 사회를 이해하는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과도 공명한다.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 의하면, 기술이나 인공지능 등의 비인간은 새로운 매개를 가능케 함으로써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확장시키는 존재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간 및 비인간과 관계할 수 있다. 김재희 외 지음, 《현대 기술 미디어 철학의 갈래들》, 그린비, 2016, 189쪽; N. 캐서린 헤일스(2016), 앞의 책, 35-60쪽.
(21) 이수안 역시 루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의 몸을 통한 ‘감각적이며 초월적인’ 체현 개념을 통해 <그녀>에서 탈체현된 몸인 인공지능의 감각 시뮬레이션을 통해 작동되는 몸의 감각을 논한다. 이수안, 「사이보그와 몸의 물질성: 가상현실 속 체현의 양가적 개념들-영화 <그녀 Her>에 대한 사이버페미니즘 관점의 분석을 중심으로—」, 《영미문학페미니즘》 제23권 2호,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 2015, 134쪽; Swapna Roy, “Affect, Embodiment and Artificial Intelligence in Spike Jonze’s Her”, Ars Artium: An International Refereed Research Journal of English Studies and Culture, Vol.9, 2021, pp.51-58.
(22) 고유 수용성 감각 또는 운동 감각은 신체 부위의 위치, 움직임, 동작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감각으로, 여기에는 관절의 위치와 움직임, 근육의 힘과 노력에 대한 지각을 포함한 복합적인 감각이 포함된다. 이러한 감각은 근육, 피부, 관절에 있는 감각 수용체의 신호와 운동 출력과 관련된 중추 신호에서 발생해, 피부 밑의 감각 즉 심부감각이라고도 불린다. 고유 수용성 감각은 팔다리의 움직임과 위치, 힘, 무거움, 뻣뻣함, 점도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며, 다른 감각과 결합하여 신체에 대한 외부 물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등 신체 이미지에 기여하며, 움직임의 제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출처: SceinceDirect.com
◀ 이전 글 보기 : 2. 비인간 인공 생명체의 정동의 문제
▶ 다음 글 보기 : 4. 감정의 모빌리티
* 이 글은 「인공지능 정동에서 체현의 문제와 감정의 모빌리티: 영화 <그녀(Her)>를 중심으로」(석당논총, 2024)를 편집 분할한 3/5번째 글입니다.
'연구 글모음 > AI의 정동, 체현, 감정의 모빌리티- 영화 <그녀>를 중심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AI의 정동, 체현, 감정의 모빌리티- 영화 <그녀>를 중심으로(5/5) (0) | 2025.05.04 |
---|---|
AI의 정동, 체현, 감정의 모빌리티- 영화 <그녀>를 중심으로(4/5) (0) | 2025.05.04 |
AI의 정동, 체현, 감정의 모빌리티- 영화 <그녀>를 중심으로(2/5) (0) | 2025.05.04 |
AI의 정동, 체현, 감정의 모빌리티- 영화 <그녀>를 중심으로(1/5) (0) | 2025.05.04 |